나오미가 입회한 지는 두 주일밖에 안되었고, 따라서 그가 연구회에 출석하기는 단 두번 임에도 불구하고 어느덧 그의 태도가 전연 예측치 아니하였던 방향으로 흐름을 알았을 때에 나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사람의 감정의 움직임이란 예측하기 어려운 것이지만 짧은 시간에 그가 나에게 대하여 그러한 정서를 품게 되었다는 것은 도무지 뜻밖의 일이었음을 나는 놀라는 한편 현혹한 느낌을 마지 않았던 것이다.
하기는 나오미가 S의 소개로 입회하게 된 첫날부터 벌써 나는 그에게서 동지라는 느낌보다도 여자라는 느낌을 더 많이 받았다. 그것은 나오미가 현재 어떤 백화점의 여점원이요, 따라서 몸치장이 다소 사치한 까닭이라는 것보다도 대체로 그의 육체와 용모의 인상이 너무도 연하고 사치한 까닭이었다. 몸이 몹시 가늘고 입이 가볍고 눈의 표정이 너무도 풍부하였다. 그의 먼촌 아저씨의 과거에 있어서 한 사람의 굳건한××으로서 현재 영어의 몸이 되어 있는 소식도 S를 통하여 가끔 들은 나였만은 그러한 나의 지식과 나오미의 인상과의 사이에는 한 점의 부합의 연상도 없고 물에 뜬 풀 모양으로 서로 동떨어진 것이었다. 그것은 마치 같은 가지에 붉은 꽃과 푸른 꽃이 이 전연 색다른 두 송이의 꽃이 천연스럽게 맺히는 것과도 같은 격이었다. 그러나 연약한 인상이라고 그의 미래를 약속하지 못하는 법은 없을 것이다.
이효석(李孝石, 1907년 2월 23일 ∼ 1942년 5월 25일)은 일제 강점기의 작가, 언론인, 수필가, 시인이다. 한때 숭실전문학교의 교수를 지내기도 했다. 호는 가산(可山)이며, 강원 평창(平昌) 출생으로 한국의 대표적인 단편소설 작가이다.
이효석은 경성제일고보(현 경기고등학교)를 거쳐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 영문과를 졸업하고, 1928년 《조선지광(朝鮮之光)》에 단편 《도시와 유령》이 발표됨으로써 동반자작가(同伴者作家)로 데뷔하였다. 계속해서 《행진곡(行進曲)》, 《기우(奇遇)》 등을 발표하면서 동반작가를 청산하고 구인회(九人會)에 참여, 《돈(豚)》, 《수탉》 등 향토색이 짙은 작품을 발표하였다.
젊은 시절의 그는 '가난뱅이 작가'였다. 그는 돈없이 자신의 가난하고 빈한한 처지를 스스로 '가난뱅이 작가'라고 자조하기도 했다. 가난뱅이 작가였던 이효석은 경성 토호 집안이었던 처가에 떳떳한 모습을 보여주고 싶어 백방으로 직업을 구했다. 중학 시절 은사가 주선해준 취직 자리는 조선총독부 경무국 검열계였다. 문인들의 작품을 사전 검열하는 곳이다.동료들의 지탄이 빗발쳤다. 결국 이효석은 열흘 만에 조선총독부를 그만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