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는 같은 편집실의 젊은 동료이었다. 평소의 친절을 두터운 우정의 표현이라고만 생각하였던 것이 우정의 한계를 넘어 돌연히 사랑의 고백이 되었을 때 유라는 현혹한 마음을 금할 수 없었다. 지금까지의 그의 친절이 별안간 치장된 함정같이 생각되어서 유라는 황급히 신변을 경계하기 시작하였다. 그의 태도와 눈치가 진하면 진할수록 쌀쌀하게 몸을 지녔다. 이것이 도리어 그의 부당한 반감을 사게 되어 마침내 절교까지에 이르렀다. A는 얼마 안되어 사를 물러가게 되었으나 그후 유라는 일신에 관한 대중없는 중상과 소문을 자주 들을 때마다 그것이 A의 유언의 소치나 아닌가 하고 우울한 날이 많았다. 일면 팔침을 맞았을 때의 남자의 계염과 천려를 슬퍼하고 민망히도 여겼다.
이효석(李孝石, 1907년 2월 23일 ∼ 1942년 5월 25일)은 일제 강점기의 작가, 언론인, 수필가, 시인이다. 한때 숭실전문학교의 교수를 지내기도 했다. 호는 가산(可山)이며, 강원 평창(平昌) 출생으로 한국의 대표적인 단편소설 작가이다.
이효석은 경성제일고보(현 경기고등학교)를 거쳐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 영문과를 졸업하고, 1928년 《조선지광(朝鮮之光)》에 단편 《도시와 유령》이 발표됨으로써 동반자작가(同伴者作家)로 데뷔하였다. 계속해서 《행진곡(行進曲)》, 《기우(奇遇)》 등을 발표하면서 동반작가를 청산하고 구인회(九人會)에 참여, 《돈(豚)》, 《수탉》 등 향토색이 짙은 작품을 발표하였다.
젊은 시절의 그는 '가난뱅이 작가'였다. 그는 돈없이 자신의 가난하고 빈한한 처지를 스스로 '가난뱅이 작가'라고 자조하기도 했다. 가난뱅이 작가였던 이효석은 경성 토호 집안이었던 처가에 떳떳한 모습을 보여주고 싶어 백방으로 직업을 구했다. 중학 시절 은사가 주선해준 취직 자리는 조선총독부 경무국 검열계였다. 문인들의 작품을 사전 검열하는 곳이다.동료들의 지탄이 빗발쳤다. 결국 이효석은 열흘 만에 조선총독부를 그만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