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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마만리 (도딤문고 12)

이 조그마한 기록은 필자가 중국을 향하여 조국을 떠난 지 바로 일개월 만에 적 일본군의 봉쇄선과 유격지구를 넘어 우리 조선의용군의 근거지인 화북 태항산중(華北 太行山中) 으로 들어온 날까지의 노상기(路上記)와 또 여기 들어온 뒤 의 생활록, 견문, 소감, 이런 것을 적어 놓은 것이다. 말하자 면 두서없는 붓끝의 산필(散筆)이다. 하나 이 기록은 언제까지 끝날 일인지, 혹은 어느때에 중 단될 일인지 필자 역시 예기치 못하는 바이다. 그것은 우리 의용군이 잔폭(殘暴)한 적군을 쳐 물리치며 압록강을 건너 장백산을 타고 넘어 우리나라 서울로 진군하는 <장정기>(長 征記)에 이르기까지 계속될 것이로되 그날이 언제라고 앞서 기약할 수 없는 동시에 장차 우리 의용군의 뒤를 따라 붓대 와 총을 들고 사랑하는 조국으로..
이 조그마한 기록은 필자가 중국을 향하여 조국을 떠난 지 바로 일개월 만에 적 일본군의 봉쇄선과 유격지구를 넘어 우리 조선의용군의 근거지인 화북 태항산중(華北 太行山中) 으로 들어온 날까지의 노상기(路上記)와 또 여기 들어온 뒤 의 생활록, 견문, 소감, 이런 것을 적어 놓은 것이다. 말하자 면 두서없는 붓끝의 산필(散筆)이다.

하나 이 기록은 언제까지 끝날 일인지, 혹은 어느때에 중 단될 일인지 필자 역시 예기치 못하는 바이다. 그것은 우리 의용군이 잔폭(殘暴)한 적군을 쳐 물리치며 압록강을 건너 장백산을 타고 넘어 우리나라 서울로 진군하는 <장정기>(長 征記)에 이르기까지 계속될 것이로되 그날이 언제라고 앞서 기약할 수 없는 동시에 장차 우리 의용군의 뒤를 따라 붓대 와 총을 들고 사랑하는 조국으로 개선키 원하는 필자의 생 사 역시 포연탄우(砲煙彈雨) 속의 일이라 기필(期必)치 못하 기 때문이다.

하나 만약에 불행히도 조국독립의 향연에 참례치 못하는 한이 있더라도, 필자 대신 이 기록과 그 외 몇 편의 창작물 이나마 우리 용사들이 채찍질하며 내달리는 병마(兵馬)의 등 에 실려 서울로 입성하여 주기를 바라 마지않는다.

이는 우리 조국의 자유와 민족의 해방을 위하여 별보다 한 껏 먼 이역에서 오랜 풍상을 갖은 고초와 박해와 기한(飢寒) 으로 더불어 싸워 가면서 거친 광야를 검붉게 물들이는 이 조국 열사들의 일을 사랑하는 국내 동포들에게 전하고자 원 하기 때문이다.

실로 우리 조국의 자유와 민족의 해방은, 우리들이 피로써 싸워 빼앗아야만 되며 또 그래야만 그 광영(光榮)도 보다 더 빛나는 것이며, 우리의 행복도 보다 더 떳떳한 것이다. 때문 에 오늘날 우리들은 고귀한 생명을 걸고 싸우고 있지 않는 가. 총칼이 숲처럼 우거진 사이를 칼날을 짚고 총부리를 앞 에 두고 국내 동포들도 처참히 싸우고 있는 줄 알지만 이 화북 태항산중에서도 역시 피비린내 나는 싸움도 계속되고 있으며 또 하루 한 시 게으름 없이 착착 싸움의 준비도 진 행되고 있는 것이다.

국내외를 들어 피와 땀으로써 싸워 지킬 조국의 자유와 행 복─때문에 우리는 또한 장차 이것을 결코 헛되이 들리는 길이 없도록 해야 할 것이다. 그 자유와 행복의 등 언저리 에 우리들이 쏟아 놓은 피눈물이 얼마나 많이 서려 있는가 를 누구보다도 뼈에 사무치게 잘 알고 있는 우리들이다.

진실로 우리는 조국의 새 역사를 창조하는 그날을 맞이한 다면 깊이 이 점을 가슴속에 새겨, 위대한 민중의 나라 건 설에 매진하여 끊임없는 분투로써 두번 다시 피를 흘리지 않도록 해야 할 것이다. 이와 동시에 또한 밖으로는 천하를 향해서도 우리 조국의 광영은 실로 우리 삼천만 민족이 피 땀으로써 싸워 맺은 소이(所以)임을 소리 높여 부르짖을 필 요가 있는 것이다.

대수롭지 않은 이 기록이 조금이라도 이와 같은 점에 이바 지함이 있다면 필자로서 이에 더한 행복이 없을 줄 안다.

너무도 절절한 사실 앞에 너무도 조그마한 붓끝이 무색함을 다만 슬퍼하는 바이다.

조국의 영광이여, 민족의 해방이여, 영원하라!
김사량(金史良, 1914년 3월 3일~1950년 10월 ?일)은 평양 출생의 소설가, 희곡 작가로 재일 한인 문학의 효시로 여겨지는 작가이다.

일제 말기 식민지 조선의 소설가, 희곡 작가. 일본어와 조선어 모두 작품을 남겼다. 1914년 3월 3일 평양부 인흥정 458의 84번지에서 출생했다. 김사량은 필명이고 본명은 시창(時昌)이다. 모친과 아내가 열렬한 기독교인으로 전해진다. 1940년 재일 조선인을 다룬 단편소설 <빛 속에>로 조선인 최초로 아쿠다가와 상 후보에 선정되었다. 여러 단편소설을 발표하며 일본 문단에서 활발하게 활동하다가 1941년 12월 9일 태평양 전쟁 발발 다음날 예방검속법에 의해 구금되었다. 도쿄 제국대학 문학부 독일문학과를 졸업하고 평양 대동공업전문학교 독어교사로 부임했다. 일제 학도병 위문단원으로 중국에 파견된 틈을 타 연안으로 탈출, 조선의용군에 입대하여 각종 희곡과 르포를 썼다. 이 때의 경험을 쓴 <노마만리>는 르포문학의 걸작이자 귀중한 사료로 꼽힌다. 1945년 8월 해방을 맞아 귀국한 다음 북한 문학조직 정치활동 및 대학 강의, 창작 등 활발한 활동을 벌이지만 비김일성계파이기에 작품집에 실을 작품이 누락되는 등 부침을 겪는다. 1947년 시인 구상의 데뷔 작품집인 시집 <응향> 검열위원으로 관여했다. 이후 약 2년 간 침묵을 지키다가 1950년 6.25 종군 작가로 남하하여 종군기를 집필한다. 같은 해 10월경 강원도 원주 문막 부근에서 심장병으로 낙오하여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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