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서방이 사는 ×촌은, 그곳서 그중 가까운 도회에서 오백 칠십 리가 되고, 기차 연변에서 삼백여 리며, 국도에서 일백 오십 리가 되는, 산골 조그만 마을이었 었다. 금년에 사십여 세에 난 황서방이, 아직 양복장 이라고는 헌병과 순사와 측량기 수밖에는 못 본 만큼, 그 ×촌은 궁벽한 곳이었었다. 그리고 또한 그곳에서 십 리 안팎되는 곳은 모두 친척과 같이 지내며 밤에 마을을 서로 다니느니만치, 인가가 드문 곳이었었다.
산에서 호랑이가 내려와서 사람을 물어갈지라도, 그일 이 신문에도 안 날이만치, 외따른 곳이었었다. 돈이라 하는 것은 십 원짜리 지전을 본 것을 자랑삼느니만치, 그 동리는 생활의 위협이라는 것을 모르는 마을이었 었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그 동리는 순박하고, 질소하고 인심 후하고, 평화로운—원시인의 생활이라 하여도 좋을 만한살림을 하는 마을이었었다.
본관 전주. 호 금동(琴童) ·금동인(琴童人) ·춘사(春士). 창씨명(創氏名) 곤토 후미히토[金東文仁]. 평남 평양 출생. 일본 도쿄[東京] 메이지학원[明治學院] 중학부 졸업, 가와바타 미술학교[川端畵學校]를 중퇴하였다. 1919년 최초의 문학동인지 《창조(創造)》를 발간하는 한편 처녀작 《약한 자의 슬픔》을 발표하고 귀국하였으나, 출판법 위반 혐의로 일제에 체포 ·구금되어 4개월 간 투옥되었다. 출옥 후 《목숨》(1921) 《배따라기》(1921) 《감자》(1925) 《광염(狂炎) 소나타》(1929) 등의 단편소설을 통하여 간결하고 현대적인 문체로 문장혁신에 공헌하였다.
이광수(李光洙)의 계몽주의적 경향에 맞서 사실주의적(寫實主義的) 수법을 사용하였으며, 1925년대 유행하던 신경향파(新傾向派) 및 프로문학에 맞서 예술지상주의(藝術至上主義)를 표방하고 순수문학 운동을 벌였다. 1924년 첫 창작집 《목숨》을 출판하였고, 1930년 장편소설 《젊은 그들》을 《동아일보》에 연재, 1931년 서울 행촌동(杏村洞)으로 이사하여 《결혼식》(1931) 《발가락이 닮았다》(1932) 《광화사(狂畵師)》(1935) 등을 썼다. 1933년에는 《조선일보》에 《운현궁(雲峴宮)의 봄》을 연재하는 한편 학예부장(學藝部長)으로 입사하였으나 얼마 후 사임하였다.
그 밖의 작품으로는 《붉은 산》 《태형》《김연실전》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