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명은 김일(金鎰)이며, 마의태자라는 말은 별칭으로 마로 된 옷을 입고 다녔다고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신라 제56대 임금인 경순왕과 죽방왕후(...) 사이에서 태어났다.
후백제에 정변이 일어나 신검이 즉위하고 건국왕 견훤이 금산사에 유폐되었다가 고려에 귀부하는 사태가 발생하였고, 이로 인해 사실상 후삼국시대를 통일할 대세가 고려로 정해지자, 신라의 마지막 왕인 경순왕은 대세를 거스르지 못하고 고려에 항복하기로 결정했다. 마의태자는 여기에 반대하였으나 결국 왕의 뜻을 막지 못하고 신라는 고려에 항복하고 만다. 마의태자는 아버지를 따라 개경으로 가지 않고 개골산(=금강산)으로 가버리고 삼베(마)로 만든 옷을 입고 가난하게 살았으며, 그 때문에 마의태자라는 별명을 가지게 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또 다른 이야기에서는 강원도 인제로 가서 신라의 남은 충신들과 지사들을 규합해 고려에 저항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어느쪽이 맞는지는 확실치는 않지만, 일부에서는 금강산으로 들어간 마의태자와 인제로 간 마의태자가 다른 인물이 아닌가라는 추측을 하기도 한다.
이광수(李光洙: 1892-1950?)
평북 정주 출생. 호는 춘원(春園). 일본 와세다 대학 철학과 수학 중 동경 2·8 독립 선언을 주도. <조선 청년 독립단 선언서> 기초. 상해 <독립신문> 편집 주관. <조선일보>, <동아일보> 등에 관계함. '수양 동우회 사건'으로 투옥됨. <조선 문인 협회> 회장 역임. 1909년 <백금학보(白金學報)에 <애(愛)>를 발표한 이후 1917년 장편소설 <무정>을 <매일신보>에 연재하여 폭발적인 호응을 얻었으며 신문학 초창기에 선구적 역할을 했다.
이광수는 최남선과 함께 언문일치의 신문학 운동을 전개하여 한국 근대 문학의 여명을 이룩한 공헌자로 평가받고 있으며, 초기 한국 문단의 성립을 주도했다는 혁혁한 공적을 인정받고 있다. 그러나 그는 말기에 변절하여 친일적 태도를 보였다는 점에서 부정적 측면을 지닌 작가이기도 하다. 그의 작품 세계는 대중적인 성향을 띄면서도 계몽주의적·이상주의적 경향을 지니고 있는데 지나친 계몽 사상으로 인해 설교적인 요소가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