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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린/피아노

현진건의 단편소설: 유린/피아노이다. ××여학교 3년급생 정숙은 새로 한 점이 넘어 주인집에 돌아왔지만, 여름 밤이 다 밝지도 않아 잠을 깨었다. 이 짧은 동안이나마 그는 잠을 잤다느니 보다 차라리 주리난장을 맞은 사람 모양으로, 송장같이 뻐드러져 있었다. 뒤숭숭한 꿈자리에 가위 눌리고만 있었다. 물같이 흐른 땀이 입은 옷과 이불을 흠씬 적시고 있었다. 어째 제 주의 모든 것이 변한 듯싶었다. 그는 의아히 여기듯이 이리저리 시선을 던지었다. 새벽 빛은 허여스름하게 미닫이에 깃들이고 있다. 맞대 놓인 두 책상 위에 세워 있는 책들이 희미하게 보인다. 제 곁에는 깊이 잠든 정애의 까만 머리가 흰 베개 위에 평화롭게 얹히어있다. 이불이고, 요이고, 베개이고 변한 것은 하나도 없었다. 모든 것이 있..
현진건의 단편소설: 유린/피아노이다.

××여학교 3년급생 정숙은 새로 한 점이 넘어 주인집에 돌아왔지만, 여름 밤이 다 밝지도 않아 잠을 깨었다. 이 짧은 동안이나마 그는 잠을 잤다느니 보다 차라리 주리난장을 맞은 사람 모양으로, 송장같이 뻐드러져 있었다. 뒤숭숭한 꿈자리에 가위 눌리고만 있었다. 물같이 흐른 땀이 입은 옷과 이불을 흠씬 적시고 있었다.

어째 제 주의 모든 것이 변한 듯싶었다. 그는 의아히 여기듯이 이리저리 시선을 던지었다.

새벽 빛은 허여스름하게 미닫이에 깃들이고 있다. 맞대 놓인 두 책상 위에 세워 있는 책들이 희미하게 보인다. 제 곁에는 깊이 잠든 정애의 까만 머리가 흰 베개 위에 평화롭게 얹히어있다. 이불이고, 요이고, 베개이고 변한 것은 하나도 없었다. 모든 것이 있던 그대로 있었다. 변해진 것은 제 자신이었다.
저자 - 현진건
호는 빙허(憑虛). 1900년 8월 9일(음력) 대구 출생. 서당에서 한문을 수학하다가, 1912년 일본의 세이조중학(成城中學)에 입학하여 1917년에 졸업하였다.
이에 앞서 1915년에 이상화‧백기만‧이상백 등과 함께 동인지 『거화(巨火)』를 발간했다 1918년 상해에 있는 둘째 형 정건(鼎健)을 찾아가 호강대학에서 수학하였다. 1921년 조선일보사에 입사한 것을 계기로 『동명』, 『시대일보』를 거쳐, 1936년 일장기말소사건으로 1년간 투옥될 때까지 『동아일보』 기자로 활동하였다. 1943년 4월 25일 사망하였다. 1920년 『개벽』에 단편 「희생화」를 발표하여 혹평을 들었으나, 이듬해 자전적 소설 「빈처」를 발표함으로써 문단의 주목을 받았다.
당시의 현실을 아이러니적 수법에 의하여 고발한 소설들이다. 셋째 단계는 역사소설을 집필한 시기이다. 「적도」, 「무영탑」, 「흑치상지」 등의 역사장편소설을 통하여 민족혼을 표현하려고 시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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