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경애의 단편소설이다. 1929년 말부터 1931년 초에 이르기까지 조선일보에 독자투고 형식으로 4편의 글을 게재했다. 강경애는 1931년 단편소설 ‘파금(破琴)’으로 문단에 데뷔했으며 장편소설 <어머니와 딸>을 발표함으로써 작가로 인정받았다. 그러나 중앙 문단에는 나서지 않고 가정에서 글을 썼다. 불우한 가정 환경과 극한의 궁핍, 서울 중심의 중앙 문단과는 동떨어진 생활 등 강경애는 식민지 시기 다른 여성 작가와는 다른 환경에서 출발했다. 대부분의 여성들이라면 자기 정체성을 세우는 성찰의 시간도, 글을 쓸 만한 시간과 공간도 가지지 못한 불우한 환경을 극복하며 논설과 소설을 지었다.
그녀가 양주동(梁柱東)과 함께 고향 장연을 떠나 경성의 ‘금성’사에서 동거를 하며 문학공부를 했던 것이 1924년이었다.
간도로 건너간 이후 계급투쟁을 내용으로 한 단편 〈그 여자〉(삼천리, 1932. 9)와 콩트 〈월사금〉(신동아, 1933. 2)을 발표했다.
시 〈책 한 권〉(금성, 1924. 5)·〈가을〉(조선문단, 1925. 11) 등을 발표한 뒤, 소설 〈파금 破琴〉(조선일보, 1931. 1. 27~2. 3)·〈어머니와 딸〉(혜성, 1931. 5~1932. 4)을 발표하여 문단에 나왔다. 당시 간도의 사정을 잘 그린 수필 〈간도를 등지면서〉(동광, 1932. 8)·〈간도야 잘 있거라〉(동광, 1932. 10) 등과, 사상적 스승이자 동지인 남편과의 관계를 그린 수필 〈원고 첫 낭독〉(신가정, 1933. 6)·〈표모(漂母)의 마음〉(신가정, 1934. 6) 등을 발표했다. 남편 장하일은 사상범으로 체포된 경험이 있고, 만주에서도 계속 활동한 민족운동가였다. 그녀가 조선 프롤레타리아 예술가동맹(KAPF)과 직접 관계하지 않았음에도 사회과학적 현실인식이 뚜렷한 작가의식을 바탕으로 진보적 사실주의 작품을 쓸 수 있었던 것은 남편의 도움으로 가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