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재 신채호선생님의 을지문덕전.
이 책은 1908년 단재 신채호가 단행본으로 낸 최초의 저서인 국한문판 '을지문덕(乙支文德)'을 한글로 번역한 책이다. 당시는 단재가 29세의 나이로 국내 최대의 일간지이며 항일언론의 선봉에 섰던 '대한매일신보'의 논설기자로 주옥같은 논설과 사론(史論)을 발표하여 민족혼을 일깨우던 시기였다. 또한 여성 계몽을 위해 발행되던 '가뎡잡지'의 편집인으로 직접 잡지를 만들기도 하며 양기탁·안창호 등과 함께 비밀결사인 신민회에 참여하여 기울어 가는 조국을 구하기 위해 애국적인 민족운동을 하던 시기였다.
국한문판은 1908년 5월 30일에 광학서포에서 발간한 것으로 변영만·이기찬·안창호가 서문을 썼으며 이들 서문은 '을지문덕'이 어떤 목적으로 쓰여진 것인가를 잘 나타내 주고 있다. 목차에서는 ‘우리나라 4천년역사상 으뜸가는 큰 위인’이란 수식어를 을지문덕이란 말 앞에다 얹어 긴 이름의 제목을 붙였다.
한글 번역판은 그해 7월 5일 발행되었는데 번역은 김연창이 하고 변영헌이 교열을 보았으며 출판은 국한문판을 발행한 광학서포가 맡았다. 한글판 '을지문덕젼'에는 국한문판에 나오는 변영만 등의 서문과 범례 그리고 목차가 실려 있지는 않고 한글로 옮기면서 띄어쓰기를 하였으며 약간의 의역과 첨삭을 하였으나 원저의 내용을 충실히 표현하고 있다.
항일독립운동가, 사학자, 언론인으로서 본관은 고령(高靈)이며 필명은 금협산인(錦頰山人) ·무애생(無涯生)·열혈생(熱血生)·한놈·검심(劍心)·적심(赤心)·연시몽인(燕市夢人)이며 가명은 유맹원(劉孟源)·박철(朴鐵)·옥조숭(玉兆崇)·윤인원(尹仁元)이다. 그리고 호는 단재(丹齋) ·일편단생(一片丹生) ·단생(丹生)이며 대전 출생이다. 아버지는 광식(光植)이다. 사간원 정언(정6품)을 지낸 할아버지 성우(星雨)에게서 한학교육을 받았고, 10여 세에 사서삼경과 〈통감〉을 읽어 신동이라 불렸다. 1897년(광무 1) 할아버지의 소개로 전 학부대신 신기선(申箕善)의 집에 드나들면서 신구서적을 섭렵했으며 1897년 신기선(申箕善)의 추천으로 성균관(成均館)에 들어가 이남규(李南珪) 문하에서 수학하면서 김연성(金演性)·변영만(卞榮晩)·이장식(李章植)·유인식(柳寅植) 등과 사귀었다. 그해 10월 독립협회에 참여하여 활동했으며, 1901년 신규식이 설립한 문동학원(文東學院)에서 학생을 가르쳤다. 1904년 6월 성균관에서 조소앙 등과 함께 항일성토문을 작성하여 이하영(李夏榮) 등의 매국행위를 규탄하는 한편, 신규식·신백우 등과 산동학원(山東學院)을 설립하여 계몽운동을 폈다. 1905년 2월 성균관 박사가 되었으나, 그해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장지연(張志淵)의 초청으로 《황성신문(皇城新聞)》에 논설을 쓰기 시작하였다. 이듬해 1906년 양기탁의 천거로 《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 주필로 활약하였으며, 내외의 민족 영웅전과 역사 논문을 발표하여 민족의식 앙양에 힘썼다. 즉, 1910년 망명할 때까지 〈일본의 삼대충노(三大忠奴)〉·〈한일합병론자에게 고함〉 등의 논설과 〈독사신론 讀史新論〉 등 역사관계 논문, 시론인 〈천희당시화 天喜堂詩話〉 등을 연재하고, 〈대한협회월보〉·〈대한협회회보〉 등에 〈대한의 희망〉·〈역사와 애국심과의 관계〉 등을 발표했다. 번역서로 〈이태리건국삼걸전〉·〈을지문덕〉을 국한문판으로 발행하기도 했다. 또한 여성교육용 한글잡지인 〈가정잡지〉에도 관여했다. 이러한 언론활동과 더불어 1906년 3월 국권회복을 위해 교육과 산업을 진흥시켜야 한다는 목표 아래 결성된 대한자강회와 그 후신인 대한협회에 참가했다. 1907년 양기탁·이동녕·이회영·이동휘·안창호·전덕기·이갑·이승훈 등과 더불어 비밀결사인 신민회(新民會)를 결성하고 국채보상운동(國債報償運動) 등에 가입 ·참가하고, 이듬해 순 한글 《가정잡지》를 편집 ·발행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