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효석의 단편소설이다.
혼잡한 밤 정거장의 잡도를 피하여 남과 뒤떨어져서 봉천행 삼등차표를 산 그는 깊숙이 모자 밑 검은 안경 속으로 주위를 은근히 휘돌아보더니 대합실로 향하였다. 중국복에 싸인 청년의 기상은 오직 늠름하였다. 조심스럽게 대합실 안을 살펴보면서 그는 한 편 구석 벤취 위에 가서 걸터앉았다.
찻시간을 앞둔 밤의 대합실은 물끓듯 끓었다. 담화, 환조, 훈기, 불안한 기색, 서마서마한 동요, 영원한 경영, 엄숙한 생활에 움직이고 움직였다. 그 혼잡의 사이를 뚫고 괴상한 눈이 무수히 반짝였다. 시골뜨기같이 차린 친구―희조한 도리우찌, 어색한 양복저고리 짧고 깡또한 바지 어디서 주워 모았는지 너절한 후까 고무 게다가 값싼 금테 안경으로 단장한 그들의 눈은 불유쾌하리만치 날카롭게 빛났다. 영리한 그에게 이 어색하게 분장한 「시골뜨기」쯤야 감히 두려울 바가 아니었지만 피로를 모르고 새롭게 빛나는 그들의 눈은 몹시도 불유쾌하고 귀치않은 존재였다. 그것은 길을 막고 계획을 부수려고 노리는 무서운 독사의 그것이었다. 그러나 이것이 그의 생활과는 뗄레야 뗄 수 없는 고맙지도 않은 존재였다. 그만큼 그의 전생활은 말하자면 초조와 불안의 연쇄였다. 가정이 있고 아내가 있고 일신을 보호하여 주는 사회와 법률이 있는 그런 것이 그의 생활은 아니다. 지혜를 짜고 속을 태우고 용기를 내고 힘을 쓰고 하루면 스물 네 시간 일년이면 삼백 육십 오일의 모험이 있고 죽음이 있다. 이것이 그의 생활이었다. ―이러한 자기의 처지와 주위의 군중을 대조하여 생각할 때에 그는 침울하여졌다.
저자 : 이효석
호는 가산(可山), 필명은 아세아(亞細亞). 1907년 2월 23일 강원도 평창군 봉평 출생.
1920년 경성제일고보에 입학하여 톨스토이, 투르게네프, 체홉 등의 러시아 소설을 탐독하면서 1년 선배인 유진오와 교우관계를 가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30년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 영문과를 졸업했다 1934년부터 평양 숭실전문학교 교수로 재직하면서 작품활동을 펼치다가 1942년 5월 25일 사망했다. 경성제대 재학중이던 1928년 『조선지광』에 「도시와 유령」을 발표하면서 문단에 등단하였다. 등단 직후 한동안 동반자작가로 활동하면서 「기우」(1929), 「깨뜨려지는 홍등」(1930), 「노령근해」(1930), 「북국사신」(1930), 「마작철학」(1930) 등의 작품을 발표하였다. 이 작품들은 이른바 제3기 프로문학의 성격을 띠는 것으로, 프롤레타리아의 이익을 옹호하는 입장에 서 있으면서도 기교면에서의 열등성을 극복하고 있는 작품들이다.
프로문학의 전반적인 퇴조와 함께 그는 1933년 이무영‧유치진‧정지용‧이상‧김기림‧이태준 등과 순수문학을 표방한 구인회를 결성한 것을 계기로 새로운 작품세계를 추구한다. 즉 「돈(豚)」(1933)을 분수령으로 하여 그는 경향성을 버리고 자연을 배경으로 한 에로티시즘의 세계로 몰입하게 된다. 「돈」에서 작가는 식이의 애욕과 돼지의 그것이 동일선상에 있음을 상징적으로 표현하고 있거니와, 이같은 경향의 작품에는 「분녀」(1936), 「산」(1936), 「들」(1936), 「메밀꽃 필 무렵」(1936), 「석류」(1936), 「화분」(1939) 등이 있다.
자연을 배경으로 한 애욕의 묘사와 더불어 이국취향, 즉 엑조티시즘도 이효석 소설의 주요 성향으로 손꼽힌다. 그의 작품은 대체로 동반자적 경향, 에로티시즘, 이국취향의 세 가지로 분류된다. 그 중에서도 그의 문학적 본령은 에로티시즘에 있는데, 성과 자연의 자연스런 대비와 융합이 시적인 문체와 세련된 언어, 서정적인 분위기의 형성으로 작품화되어 나타난다. 이런 이유로 이효석은 한국의 1930년대 순수문학의 가장 빛나는 예술적 감동을 주는 소설가로 높이 평가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