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11년(중종 11) 채수 ( 蔡壽 )가 지은 고전소설. ≪ 중종실록 ≫ 에서는 ‘ 설공찬전 ( 薛公瓚傳 ) ’ , 어숙권 ( 魚叔權 )의 ≪ 패관잡기 ≫ 에서는 ‘ 설공찬환혼전(薛公瓚還魂傳) ’ 으로 표기하였고, 국문본에서는 ‘ 설공찬이 ’ 로 표기하고 있다.
한문 원본은 1511년 9월 그 내용이 불교의 윤회화복설을 담고 있어 백성을 미혹한다 하여 왕명으로 모조리 불태워진 이래 전하지 않으며, 그 국문필사본이 이문건(李文楗)의 ≪ 묵재일기 默齋日記 ≫ 제3책의 이면에 〈 왕시전 〉 · 〈 왕시봉전 〉 · 〈 비군전 〉 · 〈 주생전 〉 국문본 등 다른 고전소설과 함께 은밀히 적혀 있다가 1997년 극적으로 발견되었다. 국문본도 후반부가 낙질된 채 13쪽까지만 남아 있다.
작품의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순창에 살던 설충란에게는 남매가 있었는데, 딸은 혼인하자마자 바로 죽고, 아들 공찬도 장가들기 전에 병들어 죽는다. 설공찬 누나의 혼령은 설충란의 동생인 설충수의 아들 공침에게 들어가 병들게 만든다. 설충수가 방술사 김석산을 부르자, 혼령은 공찬이를 데려오겠다며 물러간다. 곧 설공찬의 혼령이 사촌동생 공침에게 들어가 왕래하기 시작한다.
작자 채수는 중종반정의 공신이면서도 이 작품을 쓴 죄로 사헌부의 탄핵을 받아 교수형에 처해질 뻔하였다가, 중종의 배려로 사형만은 면하였으나 파직당하고 말았다. 하지만 채수에게 내린 벌이 과중하다는 온건론과, 파직만으로는 경미하다는 강경론이 대립되어 4개월간이나 이 작품을 둘러싼 논란이 계속되다가 그해 12월에 가서야 종결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