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과 서양의 많은 차이 중의 하나로 자연에 대하는 태도를 들 수 있다. 동양에서는 자연에 묻혀 조화를 이루는 속에서 안주를 찾고자 하는 데 비해, 서양에서는 자연을 정복함으로써 발전하고 잘 살고자 한다.
오늘날의 세계는 서양식 물질문명과 과학기술이 판을 치고 있다. 바야흐로 인류는 만세를 부르고 과학의 승리를 능가해도 좋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곰곰 생각해 보아야 한다. 사람은 과연 자연을 정복할 수 있는가? 과학이나 기술의 발전은 과연 자연을 정복한 결과이냐, 아니면 자연을 활용한 것이냐? 또 영원과 전체를 망각하고 일시적이고 나만을 위한 부분적인 물질문명의 발달이 과연 인류에게 행복을 줄 것이냐?
인간소외, 인간상실, 정신과 신의 상실, 자원고갈과 대기오염, 무력위주의 분열 등등 위기에 처한 인류는 위의 물음에 무어라 대답할까?
기원전의 중국, 즉 춘추전국시대의 중국은 마치 오늘의 세계와 같았으며, 많은 사상가가 나타났다. 그 중 한 사람이 노자였으며, 그는 오늘과 같은 인류 사회의 꼴을 보고 통탄한 나머지 오천자의 '도덕경'을 저술하여 절망에 허덕이는 인류에게 구제의 예지를 부여했던 것이다. 노자의 생각은 대략 다음과 같다. 인간은 절대로 자연을 정복할 수 없다. 자연은 누구의 손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이른바 신이 만든 것 도 아니다. 그저 스스로 그렇게 될 수밖에 없어서 그렇게 되고, 그렇게 존재하고, 그렇게 변화하는 것이다. "스스로 그러다" 그것이 바로 진리이자 원리이다. 아무리 뛰어난 과학적 성과를 거두어도 그것은 바로 자연의 도 속에서 그렇게 되는 것이다. 인간이나 만물은 도밖에 있을 수도 없고 도 밖에서 행동할 수도 없다. 그러나 인간은 자신의 힘으로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고 착각하고 온갖 잘못을 저지름으로써 영원과 전체의 삻을 파괴하고 있다. 인간이 이기적이고 자의적으로 저지르는 가장 큰 잘못은 인위적인 정치와 전쟁이다. 따라서 노자의 화살은 이 두 가지에 집중되었다.
노자가 말하는 도는 원리이고, 덕은 원리이고, 덕은 원리에 입각한 행동이다. '노자'는 팔일장으로 되었으며 전반을 '도경', 후반을 '덕경'으로 분류하기도 한다.
노자의 '도덕경'은 총 팔일장으로 상·하편으로 나누고, 상편은 '도경', 하편은 '덕경'이라 부르기도 한다. 엄격하게 내용이 분류된 것은 아니지만, 상편 '도경'에는 주로 도 즉, 형이상적 원리를 풀었고, 하편 '덕경'에서는 도에 입각한 덕 즉, 행동적인 것을 풀었다.
도는 형이상적 실체이며 만물의 근원이자 우주 운행의 원리이다. '노자' 제25장에 '그 무엇인지 엉킨 것이 천지보다 먼저 나왔으며' '천하의 어머니라 할 수가 있다. 그러나 이름은 알 수 없고 자를 붙여 도라 하고, 억지로 이름지어대라 하겠다'고 하였다.
도는 무형의 실체다.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무형적 실재이며, 인식할 수도 없고 이름지어 부를 수도 없는 게 도 다. 도는 무어라 말할 수 없어 무라는 개념으로 파악할 수도 있다. 그러나 도에서 만물이 저마다 있고 자라고 변화한다. 이렇게 인식할 수 없는 무형의 도에서 만물이 저마다 스스로 있는 현상계로 나타나고 있으니, 있는 현상계의 모습을 가지고 볼 때 도는 바로 '스스로 있는 것'이라 하겠다.
여기에 노자가 강조하는 '무위자연'의 본뜻이 있다.
중국 고대의 철학자, 도가(道家)의 창시자.
성명 이이(李耳). 자 담(聃). 노담(老聃)이라고도 한다. 초(楚)나라 고현(苦縣:허난성[河南省] 鹿邑縣) 출생. 춘추시대(春秋時代) 말기 주(周)나라의 수장실사(守藏室史:장서실 관리인)였다. 공자(BC 552~BC 479)가 젊었을 때 뤄양[洛陽]으로 노자를 찾아가 예(禮)에 관한 가르침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 또 주나라의 쇠퇴를 한탄하고 은퇴할 것을 결심한 후 서방(西方)으로 떠났다. 그 도중 관문지기의 요청으로 상하(上下) 2편의 책을 써 주었다고 한다. 이것을 《노자》라고 하며 도덕경(道德經)》(2권)이라고도 하는데, 도가사상의 효시로 일컬어진다. 그러나 이 전기에는 의문이 많아, 노자의 생존을 공자보다 100년 후로 보는 설이 있는가 하면, 그 실재 자체를 부정하는 설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