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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상고사 (도딤문고 05)

단군시대로부터 백제의 멸망과 그 부흥운동까지가 담기어 있다. 1931년에 《조선일보》 학예란에 연재되고, 1948년에 종로서원에서 단행본으로 출간된 책이다. 본디 이 책은 신채호의 《조선사》 서술의 한 부분이었는데, 연재가 상고사 부분에서 끝났기 때문에 《조선상고사》라고 불리고 있다. 전12편으로서 편명은 1편 총론, 2편 수두시대, 3편 3조선분립시대, 4편 열국쟁웅(列國爭雄)시대 대(對)한족격전시대, 5편 (1)고구려전성시대, (2)고구려의 중쇠(中衰)와 북부여의 멸망 6편 고구려·백제 양국의 충돌, 7편 남방제국 대(對) 고구려 공수동맹, 8편 3국혈전의 시(始), 9편 고구려 대수전역(對隋戰役), 10편 고구려 대당전역(對唐戰役), 11편 백제의 강성과 신라의 음모 등이다. 제1편 총론에서 신채..
단군시대로부터 백제의 멸망과 그 부흥운동까지가 담기어 있다. 1931년에 《조선일보》 학예란에 연재되고, 1948년에 종로서원에서 단행본으로 출간된 책이다. 본디 이 책은 신채호의 《조선사》 서술의 한 부분이었는데, 연재가 상고사 부분에서 끝났기 때문에 《조선상고사》라고 불리고 있다. 전12편으로서 편명은 1편 총론, 2편 수두시대, 3편 3조선분립시대, 4편 열국쟁웅(列國爭雄)시대 대(對)한족격전시대, 5편 (1)고구려전성시대, (2)고구려의 중쇠(中衰)와 북부여의 멸망 6편 고구려·백제 양국의 충돌, 7편 남방제국 대(對) 고구려 공수동맹, 8편 3국혈전의 시(始), 9편 고구려 대수전역(對隋戰役), 10편 고구려 대당전역(對唐戰役), 11편 백제의 강성과 신라의 음모 등이다.

제1편 총론에서 신채호는 그의 역사이론을 전개한다. 그는 ‘아(我)와 비아(非我)의 투쟁으로서의 역사’를 파악하고 있다. 즉, 그는 역사발전의 원동력을 사물의 모순·상극(相克) 관계에서 파악하고 있는데, 이는 헤겔류의 소박한 변증법적 논리가 도입된 것으로 생각된다. 특히 그는 이러한 모순·투쟁 관계가 역사로서 채택되기 위해서는 시간적인 상속성과 공간적인 보편성을 가져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총론에서 저자는 역사를 객관적으로 서술하기 위하여서는 사료의 선택·수집·비판이 선행되어야 한다는 역사학연구의 방법론으로서의 실증주의를 강조하고 있다. 이러한 역사이념과 방법을 제시하면서 신채호는 과거의 사대주의적 이념에 입각하여 한국사를 서술한 유학자들과 당시 근대적인 역사학을 한다던 식민주의 사가들을 비판하고, 그 비판 위에서 이 저술의 목적과 성격을 분명히 하고 있다.

그는 이 책에서 종래의 한국사의 인식체계를 거부하고 새로운 인식체계를 수립하였다. 종래의 단군·기자·위만·삼국으로의 계승과 단군·기자·삼한·삼국으로의 계승되는 인식체계를 거부하고 신채호는 실학시대의 이종휘(李種徽)의 《동사(東史)》에서 영향을 받은 듯, 대단군조선·고조선·부여·고구려 중심의 역사인식체계를 수립하였다.

[네이버 지식백과] 조선상고사 [朝鮮上古史] (두산백과)

단재(丹齋) 신채호(申采浩, 1880.11.7~1936.2.21)선생은 충청남도 대덕군 산내면 어남리 도림마을에서 유생인 고령 신씨(高靈 申氏) 광식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선생은 7살에 아버지를, 15세에 친형을 잃었다. 정언(定言)을 지낸 조부 성우(星雨)가 운영하던 사숙에서 6세 때부터 한학을 교육받아 10세 때 행시(行時)를 지었으며, 12~13세 때 사서삼경을 독파하여 신동의 소리를 듣기도 하였다. 18세 때 조부의 소개로 한말 유학자였으며, 학부대신이었던 양원 신기선의 사저를 출입하면서 소장되어 있는 신, 구 서적을 섭렵하면서 새로운 학문에 대한 이해를 깊게 하였다. 신기선은 동도서기(東道西器)적 개화사상을 가진 정치가로, 선생은 아마도 이곳에서 개화에 대한 최초의 인식변화를 가지게 된 것으로 보인다. 19세인 1898년 가을, 신기선의 추천으로 성균관에 입학한 선생은 그곳에서 백암 박은식이 주도한 일부 진보적 유학경향을 접하면서 유교학문의 한계를 깨닫고 봉건유생의 틀에서 벗어나 점차 민족주의적 세계관을 갖게 된다.

당시 서울에선 독립협회 의 자주, 민권, 자강운동이 본격적으로 전개되고 있었다. 대중집회 형태의 만민공동회가 연일 서울 종로 한복판에서 열렸고, 러시아의 경제 군사적 간섭에 반대하는 격문이 나붙는가 하면 일본의 월미도 석탄고 기지 철수운동이 활발히 전개됐으며 <독립신문>, <매일신문>, <황성신문> 등이 이를 열렬히 지원했다. 성균관에서 개화파들과 교분을 다져온 선생이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의 문서부 간부로 활약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 해 12월 25일,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가 강제 해산되고 주동자 4백여 명이 체포되었을 때 선생 또한 구속되었다가 얼마 뒤 석방되게 된다. 이후 22세 때인 1901년, 선생은 낙향하여 예관 신규식이 청원군 낭성면 인차리에 설립한 문동학원의 강사로 부임,신교육을 통한 계몽운동을 전개함으로써 개화자강 사상가로서 자기혁신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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